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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삼일절 100주년을 맞이하여 집에서 가까운 3.1절 기념행사가 열리는 동래고등학교를 찾아가면서 삼일절 행사를 시작하기 전에 동래의 유명한 독립투사인 박차정 의사 생가를 잠시 방문했습니다.^^


영화 같은 삶을 살다간 여성 독립투사 박차정 의사 생가 방문 대한독립만세


해방후 세대인 대다수의 국민들에게 있어서 일제강점기는 역사책에서 듣기만했던 이야기라서 피부로 실감이 나지 않는 것이 사실인데 삼일절을 맞이해서 만약 나라면 당시에 어떻게 했을까하는 생각을 해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박차정 의사 생가


주소 : 부산시 동래구 명륜로 98번길 129-10 (부산시 동래구 칠산동 319-1, ☎ 051-556-0527)








박차정 의사 생가 관람시간


관람시간 : 화 ~ 일요일 10:00 ~ 17:00 (점심시간 12:00~13:00, 매주 월요일 휴관)






독립투사 박차정 의사 일생


1910. 5. 8  ~ 1944 . 5 .27


박차정 의사는 1910년 5월 8일 경남 동래에서 아버지 박용한 선생과 어머니 김맹련 여사의 3남 2년 중 넸재로 태어났습니다. 일제의 침탈에 항거하여 자결, 순국한 아버지와 독립운동가 김두전, 김두봉과 친척인 어머니,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숙부 박일형 등의 영향으로 항일의 분위기가 강한 가정환경 속에서 자연스럽게 항일민족의식을 키워나갔으며 신간회, 의열단 등에서 활동한 큰오빠 박문희, 둘째오빠 박문호 등과 함께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된 것입니다.



박차정 의사는 1925년 부산지방 여성교육의 산실이자 당시 항일여성운동을 이끌어가던 동래 일신여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이곳에서 항일민족의식과 남녀평등사상을 고취시키고 일신여학교 동맹휴악을 주도하였으며 글쏨씨가 뛰어나 교지 <일신>에 자신의 항일의식과 시대인식을 표출하는 문학작품을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1927년 민족 유일당 운동의 일환으로 여성운동의 전국적인 통일기관인 근우회가 결성되었으며 이에 박차정 의사는 근우회 동래지회 활동을 주도하고 근우회 중아집행위원과 중앙상무위원으로 선임되어 선전과 출판부문에서 화동하는 등 전국적인 차원에서 여성운동과 민족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또한 1929년 광주학생운동의 연장으로 1930년 1월 서울지역 11여학교의 시위투쟁인 이른바 <근우회사건>을 배후에서 지도하다 일경에 피체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습니다.





1930년 봄 의열단원으로 활동하는 둘째오빠 박문호의 연락을 받고 중국으로 망명한 박차정 의사는 국내에서 항일투쟁공로를 인정받아 <조선공산당재건설동맹> 중앙위원 등 의열단의 중책을 맡아 활동하였습니다. 1931년 의열단 의백 김원봉과 결혼하면서 본격적으로 의열단의 핵심멤버로 활약하였으며 난징으로 거주지를 옮겨 청년투사를 양성하기 위해 설립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에서  '임철애, 임철산' 등 가명을 사용하며 여자교관으로 활동하였습니다.






김원봉은 1935년 난징에서 좌우 독립운동단체 9개를 통합하여 <조선민족혁명당>을 창당하였으며 이에 박차정 의사는 부녀부주임으로 활동하는 한편, 1936년 지청천 장구늬 부인 이성실과 함께 <민혁당남경조선부녀회>를 결성하고 모든 조선의 여성들이 총단결하여 민족독립운동가 여성해방운동에 참여할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또한 <조선민족전선연행>이 창립되자 선전 홍보분야를 맡아 활동하였으며 산하 군사조직인 <조선의용대>ㅣ 부녀복무단장으로 활동하여 의용대원의 사기진작에 힘을 쏟았습니다.




그러나 박차정 의사는 1939년 2월 장시성 쿤륜산 전투 중에 큰 부상을 입고 후유증으로 1944년 5월 27일 충칭에서 34세를 일기로 순직하였으며 이에 정부는 공로를 기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습니다.



독립투사 박차정 의사 만세 퍼포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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